오봉조 훈장과 그 문화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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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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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때 정의현은 제주섬의 남동부에 위치해 있었다. 물이 귀하고 토질은 천박하여 농사가 잘 안되므로 생활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던 고장이다. 따라서 궁한 살림을 꾸리다보니 자녀들 훈학도 쉽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관립교육기관인 정의향교를 중심으로 학문도야에 대한 열기는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그중에도 정조연간에 고명한 학자인 오봉조(吳鳳祚) 훈장이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어 입신양명을 시키고 이 고장을 더욱 빛내게 하였다. 정의지방에서는 이에 영향을 받아 훈학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어 갔다. 그러면 오봉조 훈장과 그 제자 중에서 강성익(康聖翊), 고명학(高鳴鶴), 부종인(夫宗仁) 등 삼장령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재조명해 볼 수 있는 묘갈명(墓碣銘)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정의향교 오봉조 훈장

오봉조(吳鳳祚) 훈장은 당시 정의현 오조리에서 1730년(영조 6)에 아버지 오후찰(吳厚札)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에 고고이 소리를 울리며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군위이며, 호를 항인(巷人)이라 하였다. 오봉조는 어린시절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귀엽게 자라나던 중 그만 6세때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린 오봉조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슬픔이었으나 다행히 새로 들어온 계모인 청주한씨는 매우 훌륭한 현모양처였기에 불행 중 다행으로 오봉조를 온 정성을 다하여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학문에 능통한 훈장을 모셔와 가정교사로 들여놓고 오봉조에게 글을 가르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하늘천, 따지”하는 글 읽는 소리가 이 문간에서 울려나오기 시작하였고, 점점 학습에 몰두해 갔다. 그러나 당시 농어촌은 가난한 살림이라 농사도 짓고 잠수일도 해야만 간신히 생활을 꾸려 나갈 때였다. 청주한씨는 원래 친정에서 하지도 않던 잠수일을 열심히 배우고 해산물을 채취하여 생계에 보태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태양이 뜨겁게 오조리땅에 내려쬐이기 시작하자 어느 농가나 마찬가지로 마당에 멍석을 펴고 멱서리에 담아있던 보리를 꺼내어 널어놓았다. 이를 제주어로 ‘날레’라 하는데 이렇게 곡식을 단단히 건조시켜야 부패하지 않고 좀도 일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에 곡식을 널어놓은 한씨는 오봉조에게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다짐을 주고는 태왁을 구덕에 지고 물결 출렁이는 푸른 바다로 나갔다. 한씨는 바다에서 숨비소리를 지르고 물속에 들어갔다 떴다하는 자맥질을 반복하며 해삼, 소라 등 해산물을 한참 채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데 청천하늘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덮여왔고 어느새 번갯불이 번쩍하고 창공에 빛나더니 ‘우르르~꽝’하고 천둥소리가 귀창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다다다’하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아니 이런 변고가 있나! 마당에 곡식을 널어두었는데 빨리 가서 들여놓아야한다고 한씨는 물에서 나와 얼른 옷을 주워 입고 집으로 줄달음을 쳤다. 한편 오봉조는 훈장이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글을 읽다가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려하자 ‘아이구! 보리가 젖는다.’하고 훈장과 함께 마당으로 나가 다급하게 보리를 멱서리에 쓸어담았다. 만약 젖는다면 다시 말려야 하니 번거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므로 신속하게 담아서 집안으로 들여놓고 멍석도 말아서 비 안 맞게 들여놓았다. 아~ 이제는 되었다. 하고는 어머니가 오셔서 잘 했다고 칭찬을 하시겠지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머니가 마당에 헐레벌떡거리며 들어서고 보니 보리는 말끔히 들여놓아 있었다. 이를 본 어머니는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이내 노기 띤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 즉시 삼방마루로 아들을 불러들였다.

“야~ 아들아 이리 들어오너라!”

“예, 어머니.”하고 오봉조는 이아이 생각하며 어머니 앞으로 나아갔다.

“아들아, 이 보리는 누가 들여놓았지?”“예, 저와 선생님이 하였습니다.”

“뭣이라고, 나는 바닷가에 가면서 너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였지 누가 보리를 들이라고 하였느냐?”

“아니 어머니, 만약에 보리를 들여놓지 아니하면 비에 다 젖어버릴게 아닙니까?”

“아니, 생각이 짧은 아들아, 보리가 젖은 것은 내가 다시 말리면 되지만 너가 소비해 버린 황금같은 시간은 다시 되돌려 놓을 수가 없다. 가사를 처리하는 것은 어머니인 내 소관이고, 너는 오로지 학문을 배우는 데만 전념할 일이다. 그런데 그 배움에 전념하겠다는 집중력이 부족하고서야 어찌 성공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어머니는 크게 꾸지람을 주며 훈계를 하였다. 그 어머니의 질책을 듣던 오봉조는 ‘아차!’하고 어머니의 크고 높은 뜻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심모원려를 부족한 내가 터득하지 못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오봉조는 어머니 앞에 꿇어앉았다. “어머니, 제 소견이 좁아서 잘못했으니 한번만 용서를 해주십시오.”라고 빌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오봉조는 동서남북 살피지 않고 오로지 학문수학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아하~ 전부터 내려오기를 계모가 전실자식을 학대했다는 말들을 무수히 들어왔고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보아왔다. 그 한 예로 조선조때 연대와 작자미상인 소설 장화홍련전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 스토리는 계모가 전실소생인 자매를 심히 학대하자 결국 그 자매는 견디다 못해 연못에 빠져죽고 말았다. 결국 그 혼령이 철산부사에게 나타나 그의 힘을 빌어 계모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는 인과응보의 줄거리였다.

그렇지만 청주한씨는 전실소생인 오봉조를 잘키워서 그가 학자로 대성토록 뒷받침을 한 매우 현명하고 인자한 어머니였다. 그러기에 그로부터 27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사회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렇게 학문도야에 정진한 오봉조는 문장과 시조창으로 가히 명성을 날리게 되었으니 그가 아무렇게나 말하는 대로 받아 적어도 고칠 데가 없는 한편의 주옥같은 문장이 되었다. 그는 제주목사 주관하에 시행한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여 사후에는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었다. 그러나 학문에 해박한 그도 여러 차례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급제를 하지 못하고 번번이 낙방을 한 것은 운으로 돌려야 했다. 1778년(정조 2)에는 제주절제사겸방어사 황최언(黃最

彦)이 삼읍에 학전과 교토를 설치하여 학풍을 진작시켰다. 이때 학덕이 높은 오봉조는 허서정의현감에 의하여 훈장으로 선발되었다.1) 이에 따라 오훈장은 정의지방 학동교육에 온 정열을 기울여 그 제자중 강성익, 고명학, 부종인 등 3인을 문과에 급제시킴으로써 정의삼장령(旌義三掌令)을 탄생시킨 주역이 되었다. 그 삼장령의 약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 명

과거급제

경 력

생 몰 연 대

출 생 지

강 성 익

(康聖翊)

1783년(정조 7)

문과(병과)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예조좌랑(禮曹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천현감(泗川縣監)

비안현감(比安縣監)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747년(영조23)

~1816년(순조16)

삼달1

고 명 학

(高鳴鶴)

1795년(정조 19)

문과(갑과)

보안찰방(保安察訪)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홍문관직강(弘文館直講)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769년(영조45)

~1836년(헌종 2)

상효2

부 종 인

(夫宗仁)

1795년(정조 19)

문과(병과)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

영릉․�희릉 별검(寧陵․�徽陵別檢)

병조․�예조좌랑(兵曹․�禮曹佐郞)

후릉령(厚陵令)

성균관직강․�사예(成均館直講․�司藝)

승문원판교(承文院判敎)

대정현감(大靜縣監)

자인현감(慈仁縣監)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767년(영조43)

~1817년(순조17)

토 평

 

이래서 오조리 오훈장하면 당시 도내에서 최고의 훈장으로 지칭되기에 이르렀다.

1792년(정조 16)에 현감 허식(許湜)이 현재 명륜당 뒤편에 정의서당을 건립하였다. 그 서당의 학문을 일으키는 글인 흥학발(興學跋)을 오봉조 훈장이 썼으며 그 문안을 본편에 수록한다. 그는 평소에 많은 문장을 남겼으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위에 적은 정의서당 흥학발 외에 ‘경차오천홍효자찬’이란 시문이 남아있어 이것도 본편에 게재하고 있다. 그후 오봉조 훈장은 정의향교에서 훈학에 정성을 쏟던 중 그의 계모인 청주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오훈장은 엎드려 통곡하며 내 친어머니는 나를 낳았지만 바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계모님이 나를 애지 중지 키워 오늘날 오봉조를 있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 은혜가 하늘과 같이 높다라고 하며 상주로써 예를 다하여 장례를 지내었다. 이 청주한씨의 묘는 오조리 식산봉 북편에 있었으나 2008년 8월 오조리 1381번지로 이묘하여 부(夫) 오후찰과 합장해 있다. 이렇게 오봉조 훈장은 정의지방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1815년(순조 15)에 86세를 일기로 그 빛나는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러자 수많은 문하생들이 애도속에 수산리 대왕산 기슭에 장사지내고 그 묘비명을 제자인 고명학 전장령이 지었다. 그러나 묘지가 불길하다하여 1862년(임술) 9월 13일 오조리 1381번지 원당수로 이장을 하였다. 그후 1872년(임신) 3월에 고명학 전장령이 지은 묘갈명은 달아졌으므로 그 내용을 그대로 적어서 다시 묘갈을 세웠다. 오봉조 훈장의 제자들인 강성익, 고명학, 부종인 등 삼장령은 당시 어려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위국헌신 하였고 애향정신을 가진 훌륭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수명은 끝이 있게 마련이다. 강성익 장령은 1816년(순조 16)에 7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고, 그 묘는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2리 궁산(弓山 활뫼) 북편에 소재한다. 고명학 장령은 1836년(헌종 2)에 6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고, 그묘는 서귀포시 상효동 양근이에 소재한다. 부종인 장령은 1817년(순종 17)에 51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타계하였고, 그 묘는 서귀포시 서홍동 북예계모루에 소재한다.


정의서당에 학문을 일으키는 글

나무는 반드시 태산에 자란 소나무가 아니라도 먹줄을 놓아 다듬으면 큰 건물의 재목으로쓸 수가 있고, 옥돌은 꼭 곤륜산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도 쪼으고 갈면 종묘의 제기를 만들수 있다. 사람도 반드시 서울에서 태어나 대갓집 자손이 아니라도 재주와 기량을 배양하고 문학과 행실을 성취하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나니 만약 꼭 태산의 솔과 곤륜산을 골라 재목과 제기로 쓰려 한다면 이것은 장석의 정원에 도끼 댈 나무가 없고, 변화의 궤 속에서도 옥돌을 잃어버려 탄식함이 있을 것이나 이것이 어찌 바른 도리라 하리요. 그러나 나무가 모든 풀과 같이 썩어버리지 않고 다행히 재목이 되는 것은 먹줄 놓아 다듬는 이의 공로이며, 옥도 또한 뭇돌과 같이 버려지지 아니하고 능히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은 쪼아내고 다듬는 이

의 힘씀이 있어서이니, 진실로 그렇게 되는 까닭은 생각하여 보면 그 사이에 운수(運數)의 흐름이 있음이 아닌가? 물건이 쓰여짐도 오히려 운수에 따른다. 하물며 가장 신령하다는 사람이 불행하게 먼 지방 바닷가에 태어나 천지의 큰 이치와 일월의 밝은 이치를 알지 못하고 촌스럽고 어리숙하여 그렇게 살아가다가 그렇게 죽거나(그렇지 아니하면), 홀연히 대인군자를 만나 공경하는 교화가 흘러넘치고 배양하는 자료를 마련하여 성취하는 방법을 가르쳐 세상에 쓰여질만한 인재가 우연히 많아진다면, 어찌 그것이 우연이라 하리요. 미산의 문장은 그근원을 따지면 문옹이 촉군을 교화한 데서 비롯되었고, 민중의 경학을 말한다면 그 징조는 한문공(韓文公:韓愈)이 조주(潮州)를 다스린 데서 싹 튼 것이다. 이를 두고 볼 것 같으면 어진이의 교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멀리 가고 더욱 넓어지며 더욱 오래 가고 더욱 창성한

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문치가 지금 몇 백 년에 이르기 까지 혁혁하게 칭송되는 것을 옛사람이 말하기를 (인인의 교화는) 천지의 화육에 참여하고 왕성하고 쇠퇴되는 기운에 관계된다하였는데 그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이 바닷지방을 살펴보면 만맥지방의 요충된 길에 있으므로 국가를 방어하는 임무가 주어져있기 때문에 관장은 무비를 갖추기에 급급하고 백성들은 말 타고 활쏘기에 힘썼다. 한 하늘의

비와 이슬이 남쪽 지방을 흠뿍 적시나 넓은 바다 고을에는 북학에 뜻을 둔 선비가 거의 없어 문인들의 막힘이 아득히 길고 새벽에 이르기가 어려웠다. 지금 우리목사 황공(黃最彦)이 은대(銀臺:정삼품)의 오랜 관리로 부절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오면서부터 선비들의 습관이 투박한 것을 민망히 여겨 시문을 짓게 하여 달마다 살피고날마다 경사를 읽도록 맡기어 우리 다사들로 하여금 떨쳐 일어날 마음을 닦게 하였다. 마침내는 크게 인재를 잃을 것과 유교가 소루하여 질 것을 두려워하여 거재생의 숫자를 늘리고 선비를 배양할 땅을 구획하여 오래도록 계책을 세웠다. 절목을 살펴보면 그 마음 씀이 부지런함을 알 수 있다. 진실로 우리 선비된 이들은 공의 마음과 같이 공의 가르침을 따라 힘써 배우고 문장을 닦으매 하루도 멈추지 않아 참된 선비가 배출되고 문화가 크게 일어남에 이르른다면 다만 한 고장의 한 때 행운에 그칠 것인가. 거의 성스러운 조정의 문덕이 오랜 세월 뒤 까지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국가에 보탬이 되는 것이 문옹이 촉지방을 교화시킴과 한공이 조주를 다스림이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이다. 마침 본현의 허후(정의현감)가 그의 선대부의 치적을 계승하여 관부와 성지를 크게 수리한 끝에 향교의 오른 쪽에 재사를 짓고 접생들의 공부하는 곳으로 삼으니 이 또한 우리 고장에는 전에 없던 일이다. 계름(繼凜:경비)과 건물이 계획을 세우지 않았는데 동시에 이루어졌으니 더욱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찌 미산의 문장과 민중의 경학이 영주 바다 밖에서 다시 나오

지 않겠는가. 부끄러운 백성이 학문을 일으키고 선비를 사랑하는 성스러운 뜻에 함께 하지 아니할 수 없어서 사사로이 바라는 바를 절목의 끝에 구구히 적어 우리 고장 후진을 권면한다. 성상 즉위한 뒤 16년2) 임자년 8월 하순에 군위인 오봉조 씀.(凝窩耽羅誌에서)

 

오천 홍효자를 찬양한 시

오래도록 탁연하게 잊지 못할 그 이름이여
충과 효를 함께 닦아 해와 별 같이 빛이 나네.
삼년동안 촛불 밝혀 북쪽 궁궐 우러러 눈물 흘렸고         육년 동안 시묘(侍墓)하여 정성이 눈물겹네 행적을 찬양하는 말 대대로 전해 오고 나라에서 정려 세워 그 명성을 표창했네 후손이 대를 이어 그 가풍을 따르니 먼 지방 탐라섬에 의리가 밝혀졌다.


오봉조 훈장 묘갈명

○ 碑陽(前面)

향교훈장 향공진사 오공지묘

○ 碑陰(後面 및 側面)

공의 이름은 봉조로 군위인이

다. 부친은 후찰이고, 모친은 김

해김씨이다. 공은 옹정 경술에

태어났고 배는 광산김씨로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경문인데 광산김씨에 장가들어 3남을 낳았으니 일린, 일구, 일기이다.차남은 경준인데 부씨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니 일룡, 일붕이다.

장녀와 중녀는 일찍 죽고 막내딸은 정능보에 출가했다. 공은 가경 을해 6월 17일에 별세하여 동년 8월 8일 대왕산 을작 언덕에 묻혔다. 공은 그릇이 크고 충한 재질에 고명한 언행으로 향리에서 추앙을 받았다. 사부로 서울에도 소문이 나서 여러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늘그막에 후학장려를 스스로 맡아 서실을 짓고 자재를 교육하여 우리 고장을 크게 하였다. 선생은 86세로 복이 장수하고 호덕하여 공은 그렇게 누릴 수 있었다. 다만 애석한 것은 두 아들이 일찍 죽고 윤손이 아주 잘 자라나서 여경으로 기뻐할만하니 어찌 적선이 보답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문하에 출입을 하여 일찍이 공의 일생을 알기 때문에 대략 위와 같이 서술한다.

전장령 고명학 지음

묘지가 불길하여 동치원년 9월 13일 원당수 북쪽인 오작언덕에 이장을 하고 묵은 비는 달아졌으므로 동치11년 임신 3월에 전비문을 그대로 적어서 다시 세운다. 증손 이빈, 현손 언방, 승국이 눈물을 흘리며 짓고, 남평 문성표가 썼다.



강성익 지평 장령 묘갈명

○ 碑陽(前面)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장령 강공지묘

○ 碑陰(後面 및 側面)

공은 조선 태종2년에 입도한 전라감사 영의 12대손이다.

그 이름은 성익으로 1747년 10월 22일에 출생하여, 1783년 김용과 더불어 문과에 급

제하였고, 승문원 검교와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94년 통훈대부에 가자되었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이어서 정언으로 옮겼다.

1795년에는 사헌부지평과 장령 등 내직을 두루 걸친 충신이며 여타직은 기재하지 않는다.

배위는 공의 묘 아래쪽에 모셨고 고씨로 5남 2녀를 두었다.

(이하 자손은 너무 많아 필자가 기재를 생략하였다.)

표선면 성읍리경 궁산(활뫼) 북쪽 임좌

서기 1975년 2월 7대종손 문택

독지손 평식 재숙 재송 제손일동

 


고명학 장령 묘갈명

○ 碑陽(前面)

통훈대부 행사헌부장령 고공지묘

○ 碑陰(後面 및 側面)

공의 이름은 명학으로 제주고씨의 후

손으로 어모장군이신 수견의 10세손

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정대부이

신 천주이다. 공은 영조 기축년(영조 45년, 서기 1769년)에 태어났다. 군위 오씨인 오의훈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으니 큰 아들은 달로이다. 이 아들은 어렸을 때 향시에 합격하였고, 군위오씨인 오광현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어 조카인 덕흥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였다. 둘째아들은 원로이다. 이 아들은 경주김씨인 김상훈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니 큰 아들은 덕흥인데 큰아버지인 달로 밑으로 양자를 갔다. 둘째 아들은 덕룡이다. 셋째 아들은 석로이다. 연안김씨인 김창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니 큰 아들은 재욱이고, 작은 아들은 재흥이다. 적실이 돌아가신 후 후실을 두었으나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을 낳았으니 큰사위는 양지훈이고, 샛사위는 문창주이고, 말젯사위는 이석빈이다. 오호라 공은 태어나 깨달은 바가 있어 학문을 이루어 26세에 갑과에 합격하였다. 내직으로는 성균관전적과 훈련원주부와 홍문강직강을 지내었고, 외직으로는 보안찰방을 지내다가 통훈대부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집안이 가난하고 아버지께서 연로하시니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스스로 따비로 땅을 파고, 쟁기로 밭을 갈며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대정현감으로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효행을 겸비하였으니 가히 후세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하다고 상소를 올렸다. 헌종 병신년(1836년 헌종 2) 2월 10일에 돌아가셨으니 이때 나이가 68세이고, 한이동산 자작에 장사를 지내었다. 옛비석은 깨지고 상하여 그 슬픔을 이길 수 없으므로 새 비석을 만들어 세웠으니. 단기 4288년 을미년 늦봄 현손 고항수가 삼가 비문을 썻다. 서기 1991년 음력 4월 18일 종손인 고성배의 양근이 가족공원묘지로 이묘하였다.


 

부종인 장령 묘갈명

○ 碑陽(全面)

통훈대부 행사헌부장령 부공지묘

숙인 진주강씨

숙인 김녕김씨 앞 자(字通)에 묻힘.

○ 碑陰(後面 및 側面)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사헌부 지평, 장령 부공 묘갈명 아아! 부군종인(夫君 宗仁)이 서울 객지에서 사망했는데, 아들 계연(啓淵)이 그 묘에 명(銘)을 나에게 청하였다. 나는 군(君)과는 멀리 떨어진 사람이지만 예부터 아는 사이여서 요청하는데 늙은이가 거절할 수가 없다.군(君)의 자는 자량(子諒)으로 제주인(濟州人: 제주부씨)이다. 증조는 만웅(萬雄)이고, 조부는 행충(行忠)으로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친 도훈(道勛)은 군 때문에 기대됨이 있어 영례(榮例: 자식이 훌륭히 되면 父祖를 높이는 관례)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자품이 수여되어 관위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모친 숙부인(淑夫人)고씨(高氏)는 같은 지방의 한청(漢淸)의 딸이다. 군은 정해(丁亥: 1767.영조43) 3월25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말과 행동거지가 또래에서 높이 평가되었고, 이조판서였던 조정철(趙貞喆: 1751-1831. 1777년 정조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되고 1782년 정의로, 1790년 추자로, 1803년광양, 1805년 구례와 토산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11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떠났다. 후에 대사헌, 각조판서를 지냈다. 제주유배중의 기록인 ‘정헌영해처감록’을 남겼다.)이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에 제주사람들 모두가 두려워 떨며 감히 다니지를 못했는데, 군은 혼자서 가끔씩 따라다니며 시격(詩格)을 토론하곤 하였다. 갑인(甲寅: 1794.정조18)에 문과에 뽑혀 성균관(成均館)에 예습하여, 잠시 승정원(承政院)가주서(假注書)로서 왕명을 받들고 연산(連山: 黃山의 옛이름. 지금의 논산)에 순무사로 갔다가 나중에 복귀하니, 상감께서 이르시기를, “이 사람은 탐라(耽羅)의 대성(大姓)이다.”하시며 영릉(寧陵: 효종과 효종비의 능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별검(別檢)을 제수하고, 얼마 후 휘릉(徽陵: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시의 능호.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에 있다)으로 다시 옮겼다. 정사(丁巳: 1797.정조21)에 전강시(殿講試)에 응시하여 으뜸을 차지하여 특명으로 6품에 올랐다. 이때부터 내직으로 병조와 예조의 좌랑(佐郞), 후릉(厚陵: 정종과 정종비의 능호. 경기도 개풍군흥교면 흥교리에 있다.)의 영(令), 성균관직강과 사예, 승문원(承文院)의 판교(判校)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대정(大靜)과 자인(慈仁)의 두 현

감을 지냈다. 기사(己巳: 1809.순조9)에 비로소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 지평(持平: 정5품)이 되고, 경오(庚午: 1810.순조10)에 장령(掌令: 정4품)에 올랐는데, 상소하기를 강연에 힘쓰고 학문을 닦아야 한다고 하니, 상감께서 정중히 비답하였다. 사망한 날은 정축(丁丑: 1817.순조17) 8월26일이다. 이듬해 정월 제주 연자동(蓮子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진주강씨(晉州姜氏)종효(宗孝)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군보다 먼저 15년전에 사망하여 군묘의 왼쪽에 합장되어 있다. 김녕김씨(金寧金氏)정관(鼎寬)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계연(啓淵)은 즉 강씨(姜氏)소생이다. 1남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아아! 군은 바다 밖의 하나의 독특한 유신(儒臣)이다. 권면하여 인도함이 없이, 능히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여 나이가 미쳐 30이 되기 전에 과거급제를 마치 지푸라기 줍듯 시험을 통과하여 조정과 지방에 이름을 날렸으니, 당시로서는 한 고장의 수재라고만 할 수도 없다고 해야옳다. 군은 어버이를 효도로 섬겨서 듣건대, 어버이 거상(居喪)에 건강을 다쳐 거의 실성하였다고 한다. 집안을 다스림에는 법도(法度)가 있어 칭찬할 만하였다. 군이 서울에서 관리를 지낼 때에, 참봉 서격숙(徐格焂의 집에 유숙을 했는데, 참봉은 나에게는 종부제<從父弟>이 되어서 나는 군에 대한 것을 아주 자세히 들어왔다. 마무리하여 명(銘)에 이르노니 바깥변방에서 분발하여 교룡과 악어가 이웃들 하는데 그 지위의 기록과 그 관직의 영광 자기 어버이에게도 베풀어졌도다. 이것은 오직 학문을 열심히 한 공적이니

오호! 남방의 사람들이여. 공(公)이 대정현감(大靜 縣監)일 적에 제일먼저 정동계(鄭桐溪: 鄭蘊)의 적허(謫墟)를 찾았네 비를 세움에 목사 이원조(李源祚)가 기록하였고, 또 송죽사(松竹祠: 정온의 사당)를 지을 적에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가 편액(扁額)을 썼고 곁에 학당(學堂)을 만들어 제생(諸生)을 권장하였네. 숭정기원후 삼무인(: 1818.순조18) 8월 하순

숭록대부 원임의정부영의정 겸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서매수(徐邁修)가 짓고 쓴다. 후사을유(:1885년.고종22) 10월26일 서홍리 북예계모루 내건외해(內乾外亥)한 언덕에 셋을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이미 세웠던 묵은 비는 세월이 더욱 오래되어 비바람에 헐어 글자가 사라지고 희미하여 이 때문에 뒤에 거듭 글을 새겨 작은 비석에 삼가 작은 정성을 표시한다. 묵은 비석은 묘역 남서쪽 모퉁이에 매장한다. 서기 1987년 4월 8세종손 영삼(榮三) 후손 일동 삼가 세움 강통연이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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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南洲) 강성익(康性益) 전 지사